유재준

`이름'을 붙여 준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작업이다. 사람에게 이름이 필요한 이유는, 사람은 다 사람인데 모두가 각각 다른 개체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을 그 고유의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은 그 자체의 존재를 인정할 뿐만이 아니라 외모, 성격, 사상 등 그 사람의 개성을 인정한다는 뜻이 된다. 한 사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물의 일반적 성질만이 아니라 그 자체의 개성을 구분할 수 있는 `이름'이 필요한 것이다. 거꾸로, 한 개체의 `이름'에 그 개체의 `사실'을 심어줄 수 도 있는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가장 큰 특색의 하나는 바로 `이름' 문화라 할 수 있다. 서너살 밖에 안된 아이도 자기가 가지고 노는 모든 장난감에 이름을 붙인다. 사람 인형은 말할 것도 없고, 개, 고양이, 자동차, 기차, 비행기, 심지어는 자기 옷이나 모자도 그 물건을 지칭하는 `보통 명사'가 아니고 사람에게와 똑같은 구체적인 `고유명사'인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항상 어떤 물건을 대할라 치면 항상 그 고유 이름으로 그것을 지칭하는 것을 자주보았다. 이런 습성을 생각하면, 길거리에도, 건물에도, 장난감에도, 심지어는 컴퓨터에도 사람과 같은 이름을 지어주는 그들의 문화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물론, 최근 우리에게도 미국 문화의 영향으로 건물이나 도로에 이름을 지어주는 일이 실제로 많아졌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름 붙이기와 미국이나 서구인의 이름 붙이기가 결정적으로 다른점은, 서양인의 경우에는 대부분 사물에 붙이는 이름이 구체적인 `인물' 이름에서 유래하는데 반해, 우리의 이름은 대부분이 `추상적'이거나 또는 `관념적'인 것을 택한다는데 있다.

사실 이런 `이름' 문화의 차이는 작은 관습의 차이에 불과하기도 하고, 또 각기 다른 환경에서 보이는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 작은 관습의 차이는 바로, 서양인들은 보다 구체적인 사실들을 중시하는 반면 우리는 보다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면을 좋아한다고 하겠다. 이 점에서 우리와 그들 사이에 매우 다른 인식의 차이, 또는 그 사고 방법의 차이를 엿볼수 있다.

요즈음의 학문에는 과학이란 이름이 많이 붙어있다. 자연 과학, 사회 과학, 인문 과학, 생명 과학, 등등 모두들 과학이라는 이름을 걸고 있다. 20세기 최첨단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학의 도움없이 무엇을 할 수 있으랴만, 대조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과학이 도대체 무엇을 하는 것인지 왜 필요한지 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단, 현대 과학하면, 쥬라기 공원 같은 공상 과학 영화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같은 만능 컴퓨터, 아니면 최신 전자장비를 갖춘 자동차나 비행기등이 쉽게 연상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은 공상영화에서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기계들이 아니라, 매일마다 마주치는 일상적인 물건이나 현상들의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는 작업이 더 필요한 것이다.

과학이란, 미지의 현상을 우리의 인지를 통해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그와 연결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실제 현상은 너무 복잡해서 위에서 얘기한 것처럼 `이름'을 지어주기란 쉽지않다. 그러나, 그 현상이나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고, 그에 따라 같은 부류의 큰 현상 내에 구체적인 작은 문제들로 나누고 그 각각의 문제에 맞는 `이름'을 지어 주어야한다. 최근 우리는 공해에 관한 말을 많이 접하고 있다. 대기 오염, 수질 오염, 토양 오염 등의 용어가 있고, 이제는 모두 묶어서 환경 오염, 환경 공해등의 말도 나온다. 그런데, 정작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한 묶음으로 ``환경 공해''라는 관념적인 `이름' 보다는 대기 오염의 현상 중에서도 더욱 구체적이고 작은 사건으로 ``공장 매연 공해''나 ``자동차의 배기가스 문제''등의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사실들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출발하여 그 구체적인 사실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과학에는 `이름'짓는 작업이 필요하다. 여기서 `이름' 붙일 대상은 단순히 머리 속에 존재하는 관념도 아니고, 종교적 신념도 아니고, 추상적 개념도 아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들을 말한다. 이런 구체적인 객체를 다른 비슷한 부류로 부터 구분해내는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 바로 과학의 출발인 것이다. 이 과학하는 자세는 비단 자연 현상에만 아니라, 사회, 문화, 역사, 환경, 그리고 우리의 생활에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이웃의 이름을 알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작은 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 이런 것들이 다 과학하는 마음이요, 20세기 현대 과학 시대를 사는 우리의 기본 자세가 아닐까?